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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원한 영화인 신영균

  • 배우·치과의사·짠돌이 사업가·국회의원…‘리세스 오블리주’ 실천한 이시대 진정한 원로
  • 기사입력 2012-01-05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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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 졸업후 2년간 연극단 따라다니다 차사고에 정신이 번쩍…

서울대 치대에 들어가 동남치과를 개업했지

그런데 연기에 대한 열정은 아내도 못말리더군…

대신 절대 바람 안핀다고 약속했지, 정말 여배우와 스캔들 한번 없었어

그땐 위험한 촬영도 많았어…영화찍다 죽으면 나야 영광이지만

가족들은 어떻게 하나 고민하다 명보극장 자리에 명보제과 내고 사업을 시작했지

인기스타 시절 출연료가 그 당시 돈으로 70만원이었어…

아마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7억원 정도 될걸…



서울시 중구 초동 18-5. 1960년대엔 ‘연산군’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빨간 마후라’가 걸렸고, 70년대에는 ‘내가 버린 여자’ ‘속(續) 별들의 고향’ ‘미워도 다시한번 80’의 간판이 관객을 손짓하던 자리다.

영화 속 대사가 전국민의 유행어가 되던 그 시절, 고단한 삶을 잠시 내려놓는 쉼터이자 연인에겐 사랑의 밀어를 허락한 장소. 1957년 세워져 70, 80년대 충무로 시대를 구가했던 명보극장 얘기다. 건물과 번지수는 그대로인데 옛 명성은 희미하기만 하다. 51년 만인 2008년 영화관은 폐관했다. 지금은 공연장인 명보아트홀이 명맥만 잇고 있다. 이 건물엔 지난해부터 ‘신영균예술문화재단’ 간판이 내걸려 있다.

명보극장과 함께 한 시대를 풍미했던 원로배우 신영균(84) 씨를 세밑에 만났다. 회색 베레모와 코트, 검은색 프라다 구두를 신고 극장 앞에 나타난 노신사. 그 차림새가 온몸으로 “나는 배우”라고 웅변하는 듯하다.

한국영화의 산증인 신 씨는 2010년 10월 당시 시가 500억원대에 달하던 명보극장을 사재 출연 형식으로 기부해 우리 사회에 신선한 충격을 던졌다.

기부는 선언에 그치지 않았다. 신영균예술문화재단은 설립 1년 만에 장학사업과 단편창작지원, 필름아트캠프, 아름다운예술인상 제정 등 다양한 지원사업을 벌이며 문화예술계에 기부문화의 풍토를 다지는 중이다.

명보극장은 신 씨에게 인생이나 다름없었다. 가족과 살던 집이 있었고, 사업가로서 재능을 발견한 곳이자 충무로 시대의 숨결이 살아있는, 결코 허물어져서는 안될 자존심 같은 것이었다.

지난 30일 오전 11시부터 시작해 점심자리로까지 이어진 인터뷰에서 그는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지치지 않는 체력으로 옛 이야기를 하나씩 들려줬다.

그는 ‘리세스 오블리주(Richesse Obligeㆍ부자의 사회적 의무)’ 정신을 앞서 실현한, 이 시대의 진정한 원로이자 영원한 영화인이었다. 

치과의사에서 영화배우와 사업가, 국회의원까지 영화 속 배역만큼 다양한 삶을 산 신영균(84)씨. 문화예술계를 위해 기부한 명보아트홀(옛 명보극장) 앞에 앉은 신씨는 “좋은 배역만 있으면 아직도 영화를 하고 싶다”고 했다.                                     박해묵기자/mook@heraldcorp.com

▶고향, 한국전쟁, 통일

신 씨는 ‘연산군’에 그를 출연시켜 일약 대스타로 만든 고 신상옥 감독과 마찬가지로 이북이 고향이다. 황해도 평산. 그가 태어나고 10살 때까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다. 그가 6살 때 부친이 세상을 뜨자 모친은 짐을 쌌다.

“집에서 소학교까지 10리가 떨어져 있었다고. 하도 멀어서 만날 지각을 해. 그럼 토끼 풀 뜯어서 먹이 주는 게 벌이야. 해가 져서 집에 갈 땐 산에서 서낭당 보면 오싹오싹하지. 어린애들이 10리를 걸어다니니까 어머니가 ‘이거 힘들다, 사람은 나서 서울로 데려가야 한다’는 이런 생각을 하셨는지 3남매를 데리고 서울로 왔지.”

서울에선 동대문구 흥인초등학교를 다녔다. 어머니를 따라 나간 교회에서 크리스마스 성극 무대에 선 게 처음으로 연기의 재미를 안 계기였다. 교회 선생님을 따라 열심히 연극을 보러 다녔다. 무성영화도 없던 시절이었다. 소학교 시절 눈뜬 연기는 평생의 천직이 됐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 사망 이후 남북 상황이 새로운 국면을 맞은 요즘 신 씨는 황해도 평산에 있는 부친의 산소를 찾아볼 수 있기를 조심스레 희망해본다.

“3대 세습이란 게 굉장히 어려울텐데, 하여튼 전쟁 안 나고 평화롭게 잘됐음 좋겠어. 그럼 이북에 한 번 가봐야 하지 않겠나 싶어. 통일되면 자동차를 타고 육로로 가봤으면 좋겠어.”

▶치과의사에서 ‘딴따라’의 길로

모친은 생계를 위해 갖은 고생을 했다. 겨우 고등학교를 보낸 둘째가 가라는 대학은 가지 않고 연기를 하겠다고 하니, 모친의 마음고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터. 신 씨는 고집을 부려 고교 졸업 후 2년 동안 연극단을 따라다녔다.

“트럭에다 세트를 싣고 그 위에 배우를 타라고 그랬거든. 그때는 배우의 가족도 따라다녔어. 대전에서 대구로 가는데, 구정쯤이었을 거야. 겨울이고 차 밑으로는 눈이 깔려 있고 얼마나 춥겠어. 그래도 연극이 좋고, 젊어서 고생이라 생각 안 했거든. 그런데 트럭이 미끄러져 넘어진 거야. 바퀴에 사람이 깔리고, 애들이 울고 엄마 아빠 찾고 난리가 난 거지. ‘내가 이러다가는 가족 고생시키겠다’ 해서 치과대학을 갔지.”

서울대 치과대학에 입학하자마자 한국전쟁이 터졌다. 피란 간 부산에서 전시연합대학을 다닐 때도 연극을 하면서 생활비를 벌었다. 서울 수복 뒤 학교로 돌아와서도 연극부를 조직했다. 해군 군의관 시절 만난 아내와는 만난 지 1년 만에 결혼했다. 당시 29세. 아내 김선희 씨는 7살 아래 22세였다. 치과의사 면허자격을 딴 뒤 1958년 동대문구 회현동에다 세를 얻어 ‘동남치과’를 개업했다(김혜자 씨는 고등학교 때 이 병원에서 치료받은 일화를 소개하기도 했다).

“최무룡ㆍ윤일봉ㆍ허장강 씨 등 이런 사람들과 연극을 같이 했거든. 내가 치과를 열었다니까 우리 병원을 찾아오는 거야. 당시 배우에게 굉장히 존경받던 변기종 선생이 이가 나빠서 내가 치료를 많이 해드렸어. 그 양반이 연극단장이었는데, 연극을 꼭 좀 하라고 하더라고.”

평생 연극을 해야 신명날 사람을, 당시 젖먹이 아이를 기르던 아내조차 말리지 못했다.

“절대 바람피지 않겠다. 당신보다 미인이 어디 있느냐고 약속했지.”

그 약속은 지켜졌다. 신 씨는 평생 여배우와의 스캔들 한 번 없이 55년째 부부의 연을 잇고 있다. 부부는 2006년 금혼식에 쓰려던 1억원을 사회에 기부하고, 대신 회혼례를 성대하게 치르기로 새로운 약속을 맺었다.

▶영화배우, 명성과 부를 쌓다

첫 영화 출연작은 1960년 황순원 원작의 ‘과부’. 조봉화 감독이 허백련 씨를 통해 연극단을 몇 차례 찾아와 신 씨를 섭외했다. 첫 배역인 머슴은 성공적이었다. 투박하고 선굵은 연기파 배우의 탄생을 알렸다. 연극에서 영화로 무대를 옮긴, 요즘으로 치면 배우 최민식 같은 존재였다.

연극적인 과장된 모션은 1961년 ‘연산군’에서 제대로 살아나 그해 대종상 남우주연상, 부일영화제 남우주연상 등을 휩쓸었다. 그는 사극에 단골 출연했다.

‘5인의 해병’ ‘돌아온 해병’ ‘빨간 마후라’ 등 전쟁영화에선 남성미를 뿜어내 곱상한 외모로 인기를 끌던 배우 신성일과 쌍벽을 이뤘다.

그는 “대한민국에서 말타는 연기는 내가 제일일 것”이라고 했다. 그만큼 촬영 중 고생이 심했다는 소리다. 경마용 말, 마차끄는 말, 제주도 조랑말 등을 두루 섭렵했다. 제주도에서 ‘마적’을 찍을 땐 돌바닥에 떨어져 지금도 손가락에 흉터가 남아있다. 지금 같은 컴퓨터그래픽과 각종 특수촬영이 없던 때라 전쟁의 리얼리티를 높이기 위해 실탄을 쐈다. 모래밭이 팍팍 튀던 장면은 실제 총알을 맞은 효과였다.

“그땐 위험한 촬영이 많았어. 촬영하다 죽으면 영화배우로선 영광이다 그렇게 생각했지. 그래도 내가 죽거나 불구자가 되더라도 가족은 먹고 살게 해야겠다 해서 제과점을 시작했지.”

명보극장 자리 1층에 낸 명보제과는 충무로의 명물이었다. 태극당, 뉴욕제과, 풍년제과와 함께 4대 제과점으로 꼽히던 이 제과점은 25년간 운영했다. 극장업도 손댔다. 고향사람과 동업했던 변두리 금호극장은 명절만 되면 신발이 한가마니로 쌓이고, 비비고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다.

인기스타의 출연료는 적잖았다. 당시 돈 70만원. 지금 물가로 환산하면 7억원 정도다. 1977년엔 명보극장을 인수했다. 1978년 ‘화조’ 출연을 끝으로, 그의 출연 영화는 모두 294편에 달한다.

1961년作‘ 연산군’, 1961년作‘ 마부’, 1962년作‘ 다시는 사랑하지 않으리’, 1967년作‘ 마적’,
1967년作‘ 빨간 마후라’, 1975년作‘ 애수의 샌프란시스코’

▶짠돌이 사업가, 정치인, 원로배우

고 신상옥 감독은 1978년 은퇴한 배우를 못마땅해했다. 나이 들면 늙은대로 연기를 해야하는 게 진정 배우라는 신념에서 배우로선 ‘흠’이라고 꼬집었다. 이때부터 신 씨는 대외활동을 왕성하게 했다. 영화배우협회장, 영화인협회장, 예술인총연합회장에서 서울올림픽조직위 위원, 월드컵 유치위 위원, 서울방송 이사, 제주국제자유도시방송 회장 등 영화에서 방송ㆍ문화계로 활동 보폭을 넓혔다. 1996년과 2000년엔 15, 16대 국회의원에 당선돼 8년간 재임했다. 여의도 국회의원회관 사무실에는 가난한 배우가 찾아와 도움을 청하는 일도 잦았다.

그에겐 ‘짠돌이’란 꼬리표가 붙어 있다. 한창 잘나가는 배우 시절에도 화려한 삶을 살지 않았고, 검소했다. 절제했다. 영화제작도 배우 김희갑 씨와 동업한 단 한 차례를 빼곤 손댄 일 없다. 명동 증권빌딩에 있는 회장실이나 예술문화재단 사무실도 소박하다.

그러나 반드시 써야할 곳엔 돈을 아끼지 않았다. 요즘에도 한두 달에 한 번꼴로 옛날 배우 40~50명을 모아 식사를 대접하곤 한다.

그가 500억원을 출연했을 때 일부 세간의 관심은 재산이 과연 얼마나 되는지, 자산관리를 어떻게 하는지로 향했다. 그는 갖고 있던 빌딩 3채 중 1채를 내놓은 것이라고 했다. 자산 증식은 우연히 시작됐다. 성동구 구의동에 걸스카웃 단체가 건립하려다 포기한 건물을 인수한 것이 종잣돈이 됐다. 명보극장을 사들인 까닭은 극장 잡기가 어렵고 극장주의 횡포가 심했던 터라 영화를 마음 놓고 걸기 위해서였다.

신 씨는 영화배우를 하지 않았다면 치과의사나 사업가를 했을 것 같다고 했다.

“내가 진짜로 기업을 했다면 돈을 더 많이 벌었을 거야. 건설업을 할 기회도 있었고, 화장품 공장을 할 수도 있었는데 영화 찍으러 바쁜데 그런 거 할 시간이 어디 있었겠어.”

그의 영화 열정은 지금도 식지 않았다. 좋은 배역만 있다면 기꺼이 카메라 앞에 서겠다고 했다. “김수용 감독이 나만 만나면 ‘동갑네, 영화하자’ 그러는데 ‘작품만 가져와라. 빨리 하자’고 그래.”

그러나 80세 원로배우가 출연한 영화보다 손녀 신자형(20)의 데뷔작을 더 빨리 만나볼 성 싶다.

“손녀가 배우를 하겠다고 해서 ‘일단 공부해라. 그래야 딴따라 취급 안받는다’고 얘기했다”며 지갑에서 손녀의 사진을 꺼내 보인다. 할아버지의 외모를 쏙 뺐다. 공부보다는 영화 쪽으로 마음이 더 기운 것도 할아버지를 꼭 닮았다.

인터뷰=이경희 문화부장ㆍ한지숙 기자 /jshan@heraldcorp.com



신영균 회장이 걸어온 길

▶1928년 11월 6일생

▶본적 황해도 평산군 금암면 필대리

▶1948년 한성고 졸

▶1955년 서울대 치과대 졸

▶1958년 해군 중위 임관 및 대위로 전역(군의관)

▶1960~78년 ‘과부’ ‘상록수’ ‘연산군’ ‘5인의 해병’ ‘빨간마후라’ ‘미워도 다시한번’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등 총 294편에 출연

▶1996, 2000년 제15ㆍ16대 국회의원

▶(현)한국영화인총연합회 명예회장, 지역민영방송협회 회장, 제주방송 명예회장

▶1962년 제1회 대종상영화제 남우주연상(연산군), 제9회 아시아영화제 남우주연상(상록수), 1963년 제6회 부일영화상 남우주연상(연산군), 1964년 제11회 아시아영화제 남우주연상(빨간마후라), 1966년 제4회 청룡영화상 남우주연상(시장), 1987년 국민훈장 동백장, 2007년 제44회 대종상영화제 영화발전공로상, 2010년 제11회 대한민국 국회대상 공로상, 2011년 대한민국 대중문화 예술상 은관 문화훈장 등 다수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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