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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홍길용의 화식열전] 물가는 못 잡고 경제만 할퀴는 긴축
美긴축 글로벌 환율전쟁 촉발
日 저금리 유지 경기부양 고수
가계 고저축·저차입, 충격 버텨
증시 수익·방어율 韓·유럽 앞서

서한(西漢) 최고의 학자 가의(賈誼)가 어느날 경제(景帝)에게 총신들의 잘못을 지적하기 위해 나선다.

"폐하, 쥐 한 마리가 밤중에 구멍에서 나와 무엇을 먹고 있다가 주인에게 들키자 쌀 항아리로 숨어버려습니다. 주인이 돌을 던져 잡고 싶었지만 항아리를 깨뜨리게 될까 두려워 어찌 해야 할 지를 몰랐습니다”

“돌을 던져 쥐를 잡으면서 항아리를 깨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 어려운 일일 것이오”

한서열전에 기록된 투서기기(投鼠忌器) 얘기다. 조금 달라 보이지만 물가를 잡고 싶은데 경기가 훼손될까 두려운 요즘 중앙은행들의 딜레마인듯 싶다. 일단 미국은 항아리 보다는 쥐를 잡는 선택을 했고, 많은 나라들이 이를 따르는 모습이다.

중앙은행의 최대 목표는 통화정책 수립과 집행을 통한 물가안정이다. 물가안정의 궁극적 목표는 경제의 건전한 발전이다. 물가안정을 위한 통화정책이 경제의 건전한 발전과 이어지지 않는다면 어떨까? 통화정책으로 어찌하기 어려운 물가인데 무리하게 밀어붙이다 경제 근간이 훼손될 수도 있다. 최근 인플레의 핵심은 전쟁으로 촉발된 글로벌 공급망의 변화다. 뿌리는 경제보다는 정치에 있다.

“경기후퇴 가능성이 특별히 높다고는 보지 않는다. 하지만 최근 상황을 보면 경기후퇴가 나타날 수도 있다. 지난 몇 달 새 전쟁과 그로 인한 원자재 가격상승, 공급망 차질 등 어려운 도전들이 만들어졌다”

물가상승에 대응해 공격적인 기준금리 인상 방침을 거듭 확인해온 제롬 파월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의장이 22일(현지시간) 미국 상원 은행위원회에서 한 발언이다. 핵심은 ‘어려운 도전들’이다.

파월의 발언 이후 장 초반 오르던 뉴욕 증시는 반락했다. 연준 의장이 불황 가능성을 인정함으로써 경기 논란의 무게 추가 기울었기 때문이다. 전날 바이든 대통령은 불황을 피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었다. 시장의 우려는 금리를 올려도 물가는 잡지 못하고 경기만 훼손될 수 있다는 데 있다. 1·2차 오일쇼크와 마찬가지로 이번 인플레도 국제정치에 근본원인이 있기 때문이다. 통화정책만으로 어찌할 수 없는 문제다.

미국의 긴축은 달러 강세로 이어진다. 원자재 등 국제거래는 대부분 달러로 이뤄진다. 달러를 쓰지 않는 나라들은 통화가치가 상대적으로 하락하며 수입물가 부담이 커진다. 그래서 긴축에 동참하고 있다. 환율전쟁이다. 미국이 달러 가치를 높여 인플레를 수출하자, 다른 나라들도 금리를 높여 방어벽을 쌓는 형국이다.

그런데 유일하게 이 대열에 합류하지 않는 나라가 있다. 일본이다. 최근 1달러당 엔화 가치는 136엔까지 추락했다. 100엔당 원화값은 950원선까지 내려섰다. 24년래 최저, 21세기 들어 가장 낮은 수준이다. 엔화가치를 높여 수입물가 부담을 줄이려면 기준금리를 높여야 하는데 일본은행은 초저금리 정책을 유지하고 있다.

내달 10일 열리는 참의원 선거를 앞두고 일본 야권은 초저금리로 엔화가치가 하락, 국민들이 고물가에 시달린다며 여권을 공격하고 있다. 하지만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총리가 이끄는 자민당은 금리를 높이면 기업들이 어려워진다며 완화적 통화정책을 고수하겠다는 입장이다.

구로다 하루히코(黑田東彦) 일본은행 총재는 옥스퍼드 경제학 석사로 아시아개발은행(ADB) 총재를 지냈고 2013년 3월부터 무려 9년간 일본 중앙은행을 이끌고 있다.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총리도 일본 장기신용은행 근무경력이 있다. 일본에 전문가가 없어 글로벌 금융 흐름을 읽지 못하는 것은 아니라고 봐야 한다.

현재 일본 정부와 중앙은행은 물가상승이 외부적·비경제적 원인에서 비롯된만큼 통화정책으로 대응할 사안이 아니라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금리를 올리지 않으면 경기위축 부담도 줄고, 수출기업들의 가격경쟁력은 높아진다. 오랜 기간 저성장 늪에서 허덕여온 상황을 감안하면 물가 보다는 경기를 지키는 게 낫다는 선택을 한 셈이다. 우리와는 다른 일본 경제 상황이 그 바탕인 듯 싶다.

일본 총무성의 2021년 가계조사 결과를 보면 근로자 가구의 평균 저축률이 무려 34.2%다. 지난해 우리나라의 가계순저축률(통계청)은 11.6%다. 국제금융협회(IIF) 세계부채보고서의 올 1분기 국내총생산(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은 우리나라가 104.3%로 주요국 중 가장 높다. 일본은 59.7%에 불과하다.물가가 높아지거나 금리가 올라도 일본 가계가 우리 보다는 좀 더 버틸 수 있는 여력이 큰 셈이다.

일본의 장단기 금리차는 지난 연말 16bp(100bp=1%포인트)에서 최근 30bp까지 확대됐다. 기준금리가 유지되며 단기금리가 하락했다. 같은 기간 미국은 78bp에서 10bp 미만까지 떨어졌다. 우리나라도 58bp에서 28bp로 좁혀졌다. 장단기금리차 축소는 경기둔화를 의미한다. 2019년 이후 일본 증시 상승률은 33.04%로 미국(51.79%) 보다 못하지만 우리나라(14.35%)나 유로존(16.15%)의 2배가 넘는다.

나라 별로 상황이 다르니 어느 쪽이 옳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현재의 처방이 지나치게 부작용이 큰 접근이 아닌 지는 한번 살필 필요가 있다. 물가상승의 가장 근본적 원인은 전쟁과 국제 갈등이다. 과감히 돌을 던졌지만 항아리만 깨뜨리고 쥐를 잡지 못할 수도 있다.

kyhong@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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