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후기 회화 선구자
윤두서, 자화상(일부) |
[헤럴드경제=이원율 기자]휴. 길게 숨을 내쉬었다.
문지방을 넘고 들어가니 어른께서 양반다리를 하고 있다. 어른은 문을 등지고 앉았다. 보름달처럼 생긴 백동거울(백동경·白銅鏡)만 보고 있다. "요상하제. 반짝반짝하는 고것이 연못 물처럼 모든 걸 다 비춰준단다." 아빠의 말이 떠올랐다. 아빠는 어른께서 밤하늘에 걸린 진짜 보름달을 잠깐 따다 쓰는 것이라고도 했다. 나는 지금 어른과 한 공간에 있다. 둘이서만 있는 건 처음이었다. 어른은 백동거울이 비춰주는 자기 모습을 보느라 여념 없다. 등 돌린 어른의 풍채는 반백살 먹은 범 같다. 어른이 숨을 쉴 때마다 산맥 같은 그 덩치가 오르락내리락한다. "나리. 불편한 곳은 없습니까." 조심스럽게 물었다. 침을 꼴깍 삼켰다. 어른에게 먼저 말을 거는 것 또한 처음이었다. 야산의 검객처럼 생긴 어른은 다가가기 무서운 존재였다.
"계승아. 난 괜찮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놀라 뒷걸음질쳤다. 발뒤꿈치가 문지방에 걸렸다. 발라당 넘어졌다. 들고 온 냉수를 내던지듯 엎질렀다. 접시가 깨졌다. 안방에 물이 흥건했다. "나리,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눈앞이 까매졌다. 어른께서 내 이름을 외우고 있을 줄이야. 꿈에도 생각 못했다. 집안과 동네 사람들은 물론, 아빠조차 나를 똘순이나 언년이 따위로 불렀다. 멀쩡한 내 이름 계승을 두고서 "부르기 쉽잖아"라며 그랬다. 아빠는 당장 아까만 해도 "언년아. 어른에게 냉수라도 가져다드려라. 너도 슬슬 해야 할 일이다"라고 했다. 그런데, 지금 어른께서 뭣도 없는 어린 노비의 진짜 이름을 불러준 것이다.
윤두서가 자화상을 그릴 때 얼굴을 보기 위해 쓴 것으로 추정되는 해남 윤씨 가문의 백동경. [국립중앙박물관] |
어른이 일어섰다.
고개를 돌려 나를 봤다. 역시나 어른의 얼굴은 우락부락했다. 눈매가 매서웠다. 한겨울 서릿발 같았다. 어른을 보면 굶주린 멧돼지도 덜덜 떨 것이다.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뺨을 맞을 각오였다. 발길질이 와도 어쩔 수 없었다. 호의를 베푼 어른을 방해했다. 접시도 깨 먹고, 물까지 다 쏟아버렸다. 어른의 손바닥이 내게 왔다. 다 큰 자라 등딱지만했다.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 어른의 손은… 내 머리 위에 살포시 놓였다. "괜찮냐. 다친 곳은 없느냐." 어른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제야 눈앞이 트였다. 내가 엎지른 물은 방 한쪽에 쌓인 종이 더미까지 다 적셨다. 어른의 그림들이었다. 하지만 물을 잔뜩 빨아 먹은 이 그림들은 더는 작품이 아니었다. "나리. 제가 몹쓸 짓을 저질렀습니다." 두 다리가 아직도 달달 떨렸다. 오금이 저렸다.
"저것들? 신경 쓰지 말거라." 어른이 말했다. "나리께서 밤낮 그린 그림들입니다. 저 보름달, 아니 저 백동거울을 보고 그린 나리의 얼굴 그림도 저 안에…." "선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원래 버릴 것들이었다." "나리…." "평생 달고 다닌 자기 얼굴조차 그림으로 그리려니 쉽지 않구나. 처음부터 다시 그리려고 한다. 저건 버릴 것을 모아둔 것이다." 나는 번쩍 들어 올려졌다. 대청마루 위에 놓였다. 달빛이 내려왔다. 어른이 어느새 밤하늘에 보름달을 다시 걸어둔 모양이다. "계승아." 어른의 목소리가 들렸다. 풀벌레 소리도 함께 귓가에 닿았다. "이번 일로 절대 주눅 들지 말거라. 평소처럼 일하고, 평소처럼 놀거라. 내 가끔은 멀찍이서 계승이 너를 그리기도 한다." 어른은 나와 눈높이를 맞추며 당부했다. 어른의 얼굴은 여전히 우락부락했다. 그런데, 계속 보니 그 험상궂은 인상 속에 따뜻함이 곳곳 스며있었다. 분명히 미소 비슷한 무언가도 있었다. "저를 왜…." 갑자기 눈물이 차올랐다.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문인 화가 공재 윤두서(1668~1715)는 조선 회화의 판을 바꾼 선구자입니다.
윤두서는 '조선의 다 빈치'라는 별명이 있을 만큼 세운 공이 크고 다채롭습니다. 그가 있었기에 조선 회화 황금기를 이끈 단원 김홍도와 혜원 신윤복이 등장할 수 있었다는 말도 있습니다. '호랑이 선비'처럼 생긴 윤두서는 의외의(?) 따뜻함을 갖춘 그 시대 최고의 반전남이기도 합니다.
윤두서, 자화상 |
스쳐 가듯 봐도 깊이 각인되는 그림입니다.
눈썹은 하늘로 솟고 있습니다. 눈은 폐부를 찌르듯 강렬합니다. 누당(淚堂)은 만져질 듯 퉁퉁하고, 팔자 주름은 근엄하게 패였습니다. 꾹 다문 입술은 고집스럽지요. 구레나룻부터 이어지는 수염은 강철 덤불 같습니다. 자신을 뚫어지게 보는 듯, 감상자를 꿰뚫을 양 직시하는 듯합니다. 국보 240호, 윤두서의 자화상입니다.
영화 관상(2013)의 포스터. [쇼박스] |
영화 관상(2013)의 주인공 김내경(송강호 분)의 포스터가 이 그림을 오마주한 것으로 보여 주목받기도 했지요.
크기는 고작 38.5x20.5㎝지만요. 뿜어내는 기운이 장난이 아니지요. 블랙홀인듯 빨려 들어가는 느낌입니다. 윤두서의 친구 이하곤은 이 그림에 "6척도 되지 않는 몸으로 사해를 초월하려는 뜻이 담겼다. 긴 수염이 나부끼는 얼굴은 윤택하고 붉다. 바라보는 이는 그를 선인이나 검객으로 의심할 수 있다. 하지만 진실로 자신을 낮추고 양보하는 풍모는 무릇 돈독한 군자로서 부끄러움이 없다"는 감상평을 씁니다.
2006년 적외선 촬영을 한 윤두서 자화상. 옷깃선이 드러나있다(왼쪽). 윤두서 자화상을 확대해서 보면 얼굴 옆면에 희미하게 귀를 그린 흔적이 보인다(오른쪽). [국립중앙박물관] |
먼 미래, 강산이 수백번 바뀐 뒤 이 그림을 본 학자들은 이를 '미완성작'으로 둡니다.
귀도 없고, 목도 없고, 상체도 없었습니다. 유령처럼 얼굴만 둥둥 떠 있던 탓입니다. 일각에선 "얼굴과 눈 말곤 본질적인 게 없잖나. 그래서 일부러 그리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도 있긴 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귀와 함께 가슴 부분 옷깃, 옷 주름까지 그려진 완성작이었습니다. 300년 세월의 풍파를 견디다 못해 옅어지고 지워졌다는 분석이 중론입니다.
1937년 조선총독부가 펴낸 '조선사료집진속' 제3집에 윤두서작(作) 자화상의 옛 모습이 있는데요. 가슴 부분 옷깃과 옷 주름까지 살아있습니다. 2006년 국립중앙박물관이 현미경과 적외선, X-선 촬영과 형광분석법 등 당시 첨단 기법을 갖고 재분석합니다. 두 귀와 옷깃, 옷 주름이 분명하게 나타났습니다. 원래는 채색까지 돼 있었다는 점 또한 드러났습니다. 다만 몇몇 학자들은 "귀 모양 등이 너무 어색하다"며 가필(加筆)의 가능성도 제기했습니다.
윤두서는 수백년간 이어진 조선의 화풍을 바꾼 혁신가입니다. 조선 땅에 등장한 첫 사실주의 화가입니다.
사실주의는 보이는 걸 그대로 담는 화풍입니다. 피사체의 외면을 넘어 요동치는 내면도 그립니다. 나아가 그 시대상까지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표현하는 기법입니다.("천사요? 데려오면 그려드리죠" 이놈의 똥고집[후암동 미술관-귀스타브 쿠르베 편] 참고) 당시 조선이 세계 패권국 중 하나에다 윤두서가 주류(主流) 중 주류였다면, 동·서양 미술사가 지금과는 조금이나마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도 듭니다.
윤두서, 자화상(일부) |
윤두서의 자화상을 다시 볼까요. 외면은 윤두서의 모습 그 자체입니다. 타임머신을 타고 그 시대 윤두서가 사는 마을로 가게 된다면요. 이 그림만 보여주면 누군들 "당연히 윤두서 아닌가!"라고 할 겁니다. 내면은 형형한 눈, 회오리치듯 말린 터럭에서 느낄 수 있지요. 누구는 옹골찬 기개를 봅니다. 또 누군가는 못다 이룬 한(恨)을 엿봅니다. 이 그림에서 볼 수 있는 당시 시대상은 무엇일까요. 잘린 탕건(宕巾)에서 짐작할 수 있습니다. 남자가 망건(網巾) 위에 쓰는 탕건은 제도권 관직의 상징이었습니다. 이 중요한 걸 제대로 안 그린 겁니다. 당시는 임진왜란·병자호란 등 격동을 겪은 뒤 그간의 권위가 급격히 무너지는 시대였습니다. 변화와 혁신에 대한 각성이 싹튼 시기였습니다. 윗부분을 빼고 그린 탕건은 그때의 어수선한 분위기를 나타내는 것이라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습니다.
윤두서, 심득경 초상화 |
윤두서는 가장 친한 벗 심득경이 죽고 나서 그의 초상화를 그려 상갓집에 보낸 적이 있는데요. 그 집안사람들은 "죽은 심득경이 살아서 돌아왔구나!"라며 펑펑 울었습니다. 심득경의 외면과 내면, 그 사회의 분위기까지 담겨있기에 느낄 수 있는 감동이었겠지요. 이 또한 윤두서가 사실주의 정점에 올랐다는 걸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입니다.
그렇다면 윤두서가 등장하기 전 조선 초기~중기의 자화상 내지 초상화는 어땠을까요. 얼굴을 창백할 만큼 맑게 표현한 그림이 많습니다. 표정도 없고, 강조하는 곳도 적습니다. 옷차림도 신선이나 도사 같은 게 많습니다. 전체적으로 깔끔하고 담백한 맛을 줍니다. 하지만 돌아서면 곧장 기억 속에서 흐릿해집니다. 나름의 멋이 있지만 밋밋함을 감출 수 없습니다. 강한 인상을 남기지는 못합니다. 윤두서의 자화상에는 그간 우리 미술사에서 볼 수 없던 특이한 점이 또 있는데요. 눈싸움하듯 정면을 보고 있지요. 한반도에서 측면 아닌 정면 초상화가 나온 건 처음이었습니다. 때마침 거울 역할을 한 백동경의 등장도 한몫했지만요.
윤두서, 돌깨기 |
윤두서는 조선이 낳은 첫 서민풍속 화가입니다. 그의 사실주의는 자화상에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윤두서는 서민을 그림의 주인공으로 둡니다. 그간 아무도 하지 않은 파격이었습니다. 왕이나 양반 등 '귀하신 몸'을 그리기에 바빠 감히 서민을 내세울 생각을 하지 않은 겁니다. 윤두서는 이 금기를 깹니다. 서민이 밭 가는 모습, 나물을 캐고 짚신을 삼는 모습 등을 그대로 그립니다. 윤두서의 후배 남태응은 "윤두서는 머슴아이를 그릴 때도 앞에 세워놓고 움직이게 했다"고 썼습니다. 윤두서는 그렇게 서민을 직접 보며 이들이 품은 한(恨)의 정서부터 애환과 비통, 체념까지 보정 없이 칠합니다. 혁명적 발상입니다. 서민을 주인공으로 삼는 일을 넘어 감정의 주체로 표현한 겁니다.
윤두서 이전에도 서민풍속화 비슷한 게 있긴 했는데요. 주로 임금의 정치·행정용 참고 자료였습니다. 예술이 아니라 교재였습니다. 속화(俗畫·저속한 그림)로도 불렸습니다. 뜯어보면 서민이 주인공도 아니었습니다. 주제는 시장이나 경기장 등 현장 자체였습니다. 그림 속 서민은 소품이었습니다. 굳이 안 보고도 그릴 수 있는 감자나 옥수수 같은 존재였습니다.
윤두서, 정물도 |
윤두서는 조선에 내려온 첫 정물화가기도 합니다. 윤두서는 꽃과 과일을 직접 '예쁘게' 배치한 뒤 그림을 그린 한반도 최초의 화가였습니다. 수박, 참외, 가지 등 여름 과일과 채소를 쟁반에 놓고 자리를 바꿔가며 그리기를 즐겼습니다. 감각이 있었던 겁니다. 이전 화가들도 풀과 열매 등을 그렸지만, 굳이 구성과 배치에 힘을 쏟지는 않았습니다.
윤두서, 채애도 [해남 윤영선 소장] |
두 여인이 산비탈에서 나물을 캡니다.
머리에 수건을 둘렀습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저고리와 긴 치마가 불편한지 걷어 올렸습니다. 허리 굽힌 여인은 한 손에 나물 캐는 칼, 다른 손에 망태기를 쥐었습니다. 옆 여인은 몸을 쭉 펴고 한숨 돌리는 듯합니다. 이른 봄날입니다. 제비가 힘차게 날아갑니다. 갈대와 잡풀이 막 기지개를 켭니다. 엷은 먹으로 칠한 먼 산은 병풍처럼 서 있습니다. 윤두서의 채애도(採艾圖·나물 캐는 여인·연대 미상)입니다. 쑥 애(艾)를 제목으로 달았으니 캐는 나물은 쑥일 겁니다.
이 그림은 한국 회화사상 제대로 된 첫 서민풍속화입니다. 나아가 그 시절 '일하는 여인'을 주인공으로 한 최초의 작품입니다. 일에 몰두하는 자세, 잠시 한눈파는 모습을 솔직하게 담았습니다. 비루한 삶 속 먹고 살기 위한 의지와 피로가 절절히 묻어납니다. 다른 화가라면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장면이지요.
귀스타브 쿠르베, 돌깨는 사람들 |
왠지 서양 사실주의 선구자인 귀스타브 쿠르베의 그림 '돌 깨는 사람들(1849)'이 떠오르는데요. 쿠르베 또한 서민을 보정 없이 그리면서 당시 노동자의 처지를 부각했기 때문입니다.
윤두서, 수하직이도 |
한 남성이 나무 아래에서 짚신을 삼고 있습니다.
이 사람 또한 왕도, 양반도 아닌 평범한 농민입니다. 햇빛을 피해 나무 그늘에 자리를 깔았습니다. 두 팔을 곧게 폅니다. 엄지발가락에 끈을 겁니다. 짚신 모양을 잡는 겁니다. 이번에는 멍때리며 잡일을 하는 서민을 주인공으로 둔 겁니다. 윤두서의 수하직이도(樹下織履圖·나무 아래에서 짚신을 삼는 그림)입니다. 한양에 사는 김 서방만큼 많은 서민을 신선처럼 크게, 있어 보이게 그려놨습니다. 담담한 표정은 보는 이에게 인생무상의 가르침까지 주는 듯합니다. 이런 그림도 당연히 윤두서 이전에는 있을 수 없는 작품이었습니다.
윤두서, 경답목우도 |
윤두서는 시대가 외면한 비운의 천재입니다.
윤두서는 자연인이었지요. 젊은 나이에 직을 내려놓은 후 속세를 등지고 삽니다. 그림과 함께 병법·지리·천문·기하학 등을 두루 익혔지만, 후진적 정치를 견디지 못해 실력을 꽃피우지 못한 탓입니다. 패관(稗官)소설까지 싹 다 읽을 만큼 개방적이었으나, 당시 경직된 사회는 그의 열린 태도를 반기지도 않았습니다.
윤두서는 자신에게 엄격하고 남에게는 너그러운 군자였습니다. 돌을 그릴 때 닷새, 물을 표현할 때 열흘을 씁니다. 온 힘을 쏟아 그렸어도 선이나 점 하나가 마음에 안 들면 냉정하게 버립니다. 윤두서의 작품이 적은 이유입니다. 그런 양반인데, 타인은 참 따뜻하게 대합니다. 증조부 때부터 집안일을 한 노비가 죽자 그 자손에게 재산을 나눠줍니다. 아들 윤덕희가 쓴 '공재공행장'에는요. "신분적 특권의식을 내세우지 않고 하인에게 이름을 불러줬다", "고향 사람들의 가난한 삶을 보고 그들이 우리 집안에 빚진 채권 기록을 불태웠다"는 등 일화가 쓰였습니다.
윤두서, 선차도 |
여러 면에서 범상치 않은 이 남자, 윤두서는 명문가 해남 윤씨 출신입니다.
윤두서는 1668년 전남 해남에서 태어났습니다. 효종의 봉림대군 시절 스승인 고산 윤선도의 증손자입니다. '어부사시사(漁夫四時詞)'로 유명한 그 분의 핏줄을 이어받은 '금수저'인 셈입니다. 윤두서의 유년기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습니다. "어릴 때부터 문예가 뛰어났다", "5~6세에 벌써 큰 글씨와 초서를 써서 칭찬을 받았다"는 말 정도가 내려옵니다. 윤두서는 숙종 때인 1693년 26살 나이로 진사에 급제하는데요. 이제 꽃길만 걸을 줄 알았는데, 다음 해 갑술환국(甲戌換局)이 터지고 맙니다.
막 꽃망울을 맺은 윤두서의 삶이 통째로 바뀝니다. 해남 윤씨는 골수 남인(南人) 집안입니다. 갑술환국은 그런 남인이 서인에게 밀려 뿌리째 뽑힌 사건을 뜻합니다. 윤두서가 29살 때는 셋째 형 윤종서가 정치적 희생양이 돼 유배 생활 끝에 결국 죽습니다. 윤두서는 그 충격에 머리와 수염이 하얗게 됩니다. 더는 견딜 수 없었습니다. 직을 내려놓습니다. 뜬구름에 죽자고 달려드는 당쟁은 더는 군자의 길이 아니었습니다.
윤두서, 마상처사도 |
윤두서는 그날 이후 다시는 권력에 손을 뻗지 않습니다.
정치를 접은 윤두서는 예술을 파고듭니다. 특히 그림에 큰 관심을 두고 독학합니다. 중국 그림이 담긴 '고씨화보(顧氏畵譜)'와 '당시화보(唐詩畵譜)' 등을 닳도록 봅니다. 펼쳐놓고 계속 베낍니다. 자기 화풍을 개발하는 경지에 오릅니다.
효심도 남달랐던 윤두서는 45살 때 양모 심 씨가 타계하자 재산을 다 바쳐 장례를 크게 하는데요. 이 일로 가세가 기운 윤두서는 한양에서 해남으로 돌아갑니다. 이제 서민 삶의 현장에 뛰어듭니다. 도읍과 한참 동떨어져 소외당하고 있는 이들과 어울리며 삽니다. 나물 캐는 여인과 짚신 삼는 노인은 물론 동물과 식물, 지도까지 종이에 담아봅니다. 사연이 많은 듯한 자화상도 이 시기에 그린 겁니다. 윤두서는 해남에 기근이 들었을 때 염전을 직접 만든 뒤 소금을 구워 돌리기도 했습니다. 당시 해남군수 최석정이 "이런 사람이 큰일을 해야 한다"며 관직을 권했지만, 윤두서가 "절대 안 한다"며 거듭 거절한 일화도 있습니다.
윤두서, 군마도 |
윤두서, 유하백마도 |
윤두서의 작품 중 가장 많이 남아있는 게 말 그림입니다.
윤두서는 말을 좋아했습니다. 병적이라는 표현도 어색하지 않았습니다. 전해져오는 유명한 말의 이름과 태어난 곳, 특징까지 줄줄 외웠습니다. 윤두서의 남다른 말 사랑은 그림에서 느낄 수 있습니다. '군마도(群馬圖)'와 '유하백마도(柳下白馬圖)' 속 생생한 말을 보면 얼마나 죽치고 앉아 관찰했는지 짐작이 갑니다. 윤두서는 틈만 나면 퀴퀴한 마구간에 가는 걸로 유명했습니다. 아침밥을 먹고 들어가면 해가 질 때까지 틀어박혀 안 나왔습니다. 노비들은 "우리도 못 견디는 냄새가 폴폴 풍기는데, 나리는 저 안에서 밥도 먹고 잠도 잔다"며 혀를 내둘렀습니다.
윤덕희, 공기놀이 |
윤용, 협롱채춘 |
끝내 못다 핀 꽃이 된 윤두서는 고향 땅을 밟고 2년 뒤 삶을 내려놓습니다.
향년 48세. 사인은 감기였습니다. 윤두서의 큰아들 윤덕희, 손자 윤용이 그의 화풍을 이어받습니다. 윤두서는 원래 덕희에게 그림을 가르치지 않으려고 했는데요. 윤두서는 직접 쓴 화평(畵評)에서 "그림 공부의 최종 목표는 도(道)"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림의 길이 워낙 험하고 인정받기도 쉽지 않은 탓에 그랬을 듯합니다. 그런데 아빠의 그림을 곧잘 따라 하는 통에 결국 마음을 바꿨다는 설입니다.
실학자 성호 이익이 윤두서의 제문을 씁니다. "우리 형제는 자신이 없었지만, 공의 칭찬을 듣고 자신감을 가졌다"는 내용입니다. 그 시절 윤두서는 실학의 태동까지 예견했는지도 모릅니다. 윤두서는 다산 정약용의 외증조부기도 합니다. 추사 김정희는 윤두서야말로 조선 후기 회화에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고 평가했습니다. "우리나라의 옛 그림을 배우려면 윤두서에서부터 시작하라." 그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찬사도 남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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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이건희 컬렉션, 이 ‘다섯 작품’ 놓치지 마시라[후암동 미술관-‘어느 수집가의 초대’ 출장 편] - 전시 특집 (2022. 6. 18.)
2)알코올 중독 ‘이 남자’, ‘파리’에 미치자 놀라운 일 터졌다[후암동 미술관-몽마르트 언덕 편] - 동행자 : 모리스 위트릴로 (2022. 9. 17.)
3)고흐 “슬픔은 왜 나한테만” 펑펑 울었다, 고작 2평 다락방에서[후암동 미술관-오베르 편] - 동행자 : 빈센트 반 고흐 (2022 9. 24.)
4)모네 “앞이 안 보여도 상관없어”…백내장도 못 막은 그의 ‘최후작’[후암동 미술관-지베르니 편] - 동행자 : 클로드 모네 (2022. 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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