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잉·중복→‘선택과 집중’
위기·전환의 시대 재도래
재계 새리더 역량이 관건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이 인기다. 최근 방송편에서는 외환위기 당시 상황을 보여주는 에피소드가 소개됐다. 마침 우리 경제가 외환위기 이후 가장 어려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어 그 내용이 눈길을 끈다. 외환위기는 양적팽창에 집착한 우리 기업들이 한계를 드러낸 결과다. 이후 혹독한 구조조정을 겪어야했지만 덕분에 경쟁력을 정비해 21세기를 맞이할 수 있었다.
외환위기 구조조정의 백미는 자동차와 반도체다. 둘 모두 선진국 산업으로 대규모 투자가 필요했다.
외환위기 전 자동차는 대표적인 과잉투자 산업이었다. 현대, 기아, 대우, 삼성, 쌍용 등이 난립했다. 두 차례의 오일쇼크 이후 선진국 자동차 산업이 대형 업체 중심으로 재편된 것과는 대조적이다. 당시 자동차 ‘빅딜’은 현대와 기아, 대우와 쌍용의 짝짓기로 결론났다. 기아 인수에 실패한 삼성이 가장 먼저 도태됐다. 최후에 살아남은 것은 현대와 기아다. 현대그룹 간판이 아닌 현대차그룹으로다.
외환위기 전 국내 대기업 집단은 자동차, 전자, 중공업·조선 등 거의 모든 제조업 분야에서 경쟁했다. 소련의 붕괴와 중국의 개혁개방으로 ‘글로벌’ 시장이 열리는 상황에서 우리끼리 치고 받았던 셈이다. ‘빅딜’로 자동차와 전자, 중공업·조선이 분리된다. 현대그룹은 반도체를 받았지만 감당하지 못한다. 현대차그룹은 자동차에 집중한 덕분에 가장 큰 성공을 거둔다. 삼성도 자동차를 떼 내면서 낸 전자와 반도체 투자여력이 높아졌다. LG는 반도체를 잃었지만 전자와 화학사업의 깊이를 키울 수 있었다.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에서는 아진자동차를 결국 순양이 품는 것으로 나온다. 현실로 치면 삼성이 기아를 인수하는 시나리오다. 미래가 과거인 주인공이 과거를 바꾼 셈이다. 달라진 미래는 어떻게 될까. 삼성이 기아를 인수했다면 자동차로 성공할 수 있었을까?
21세 초 자동차 시장은 양적 팽창의 시기다. 대규모 투자에 따른 부담을 높을 효율로 감당할 수 있어야 했다. 현대차는 기아 인수와 함께 라이벌이던 대우차가 대우그룹 해체로 힘을 잃으면서 내수시장에서 독과점 효과를 누릴 수 있었다. 이후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은 품질을 높여 해외시장을 개척한다는 ‘글로벌 톱5’ 목표를 제시한다. 해외진출을 위해 현대차는 기아차와 연구개발 통합에 이어 플랫폼까지 공유하면서 신차개발은 물론 생산부문에서도 높은 효율을 실현하게 된다. 외환위기 당시 자동차 부문 기술과 영업력에서 가장 앞선 현대차가 기아를 인수했기에 가능했던 시나리오다.
당시 삼성차 부산공장은 가장 최신의 설비를 갖췄지만 닛산의 제품을 그대로 들여와 생산하는 수준이었다. 연구개발 능력에서는 현대차는 물론 기아에도 미치지 못했다. 물론 삼성이 기아를 인수하고 공격적인 투자를 단행했다면 지금의 현대차 보다 나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시 이미 삼성이 키우던 반도체는 자동차 보다 더 큰 투자를 필요로 했었다. 삼성이 자동차와 반도체 모두에서 성공을 거둘 확률은 낮았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 새옹지마다.
드라마를 빌미로 25년 전 케케묵은 얘기를 꺼내는 이유는 우리 경제가 지금 다시 당시와 같은 대전환을 맞이하고 있어서다. 1990년대 말은 소련의 붕괴와 중국의 개혁개방, 인터넷 혁명으로 세계화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릴 때다. 지금은 미·중, 유럽연합·러시아의 대립으로 글로벌 공급망이 재편되고, 모바일을 넘어 인공지능과 로봇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 에너지 체계는 산업혁명 이후 가장 큰 변화가 이뤄지고 있다.
오랜 저금리 끝에 도래한 고금리시대는 과잉과 중복의 해소를 요구한다. 혁신을 통한 효율의 새로운 정의를 필요로 한다. 대전환의 시대에 효율이 낮은 산업과 기업은 도태될 가능성이 크다. 혁신에 소홀한 기업인도 결코 성공할 수 없다. 2023년은 달라진 글로벌 경제 생태계에서 우리 기업들이 어떻게 생존할 지를 평가받는 시기가 될 듯하다. 변화와 혁신의 흐름을 잘 읽고 투자한다면 향후 10년간 높은 보상을 얻을 수 있다는 뜻이다.
기업은 결국 사람이다. 특히 최고경영자(CEO)가 중요하다. 이들이 어떤 철학으로 경영에 임하는 지를 꿰뚫어 볼 필요가 있다. 드라마에서는 종종 대기업 총수가 ‘돈’에만 집착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간판 기업을 일군 옛 총수들은 ‘돈’보다는 ‘사업보국’을 앞세웠다. 사업에서 큰 성공을 거둬 나라 경제에 기여하고 글로벌 시장에서 인정받는 ‘뿌듯함’이 그들의 목표였다. 1990년대 현대, 삼성, LG를 이끌었던 정몽구, 이건희, 구본무 등 당시 50대 회장들이 그랬다. 당시 임직원들이 회사를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한 데에는 이들의 경영철학이 공감을 얻었기 때문이다.
25년이 지난 지금 삼성, 현대차, LG를 이끄는 이는 이재용·정의선·구광모 회장도 당시 아버지들과 비슷한 나이다. 이들의 행보에 상당기간 우리 경제의 미래가 좌우될 지 모른다. 드라마에서는 ‘재벌집 막내아들’이 활약하지만 현실의 주인공은 ‘재벌집 맏아들’들이다. ‘청출어람’이 꼭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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